그리스로마 신화(9): 트로이 전쟁(1) (2025)

트로이 전쟁의 배경과 이해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대표적이고 유명한 영웅 이야기이자 전쟁 대서사이다. 2200년 전에 실제로 벌어진 일을 바탕으로 신화로 빚어져 나온 것이기도 하다. 당시 그리스군은 우리가 보통 아는 그리스 섬과 본토에 흩여져 있던 도시국가(폴리스)들이 연합해 너무나도 탐이 나는 트로이를 손에 넣으려다 일어났다.

트로이(지금의 히사를리크)는 소아시아(아나톨리아, 지금의 터키) 해안에 있던 도시국가로 에게 해에서 흑해에 이르는 해협의 입구에 있어 무역으로 번영한 데다 곡물을 비롯한 물산이 풍부한 흑해 일대로 진출하고 싶어 했던 그리스인에게 정말 매력적이었기 때문이다.

이 전쟁 뒤에 그리스인이 흑해를 ‘폰포스 에욱세이노스(이방인에게 우호적인 바다)’라 불렀으나, 나중에 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지배하면서 자국의 남부에 있던 밝고 따뜻한 바다보다 어둡다는 생각을 하고는 고대 페르시아어인 ‘아하샤에나(검은 바다)’로 부른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다만 트로이가 오늘날에는 바다를 매립하여 육지로 되었다.

전 세계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호메로스(호머, BC 800?~750?)가 BC 9세기경에 노래한 장편의 대서사시인 <일리아스(일리아드)>와 <오디세이아(오딧세이)> 덕분이다. 일리아스는 아킬레우스(로마 신화에서는 아킬레스)를 주인공으로 한 트로이 전쟁을, 오디세이아는 오디세우스(로마 신화에서는 율리시스)의 귀환 모험담에 관한 내용이다.

<일리아스>는 첫 부분에 나와 있듯이 그리스군의 가장 위대한 전사로 여겨지는 아킬레우스에 대한 이야기로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 51일 간을 내용으로 담고 있다. <오디세이아>는 트로이에서 승리를 거둔 뒤 그리스로 돌아가는 영웅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모험을 겪은 끝에 고향에서 기다리던 아내와 재회하는 내용이다. 이 두 서사시는 서양 문학의 최초이자 최고의 걸작이다. 지금도 전하고 있으며, 문학·예술을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에서 그 주제나 소재로서 다채롭게 활용되고 있다.

트로이 전쟁의 시작: 파리스의 사과(파리스의 심판)

그리스 신화에서는 올림푸스의 3여신이 자신들의 아름다움을 놓고 서로 경쟁하면서 그 불화로 인해 트로이 전쟁이 벌어지는 것으로 나온다. 신들의 여왕 헤라, 지혜의 여신 아테나, 사랑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는 누가 가장 아름다운지를 가리고 싶어했다.

바다의 여신 테티스와 아이기나(에기나) 왕 펠레우스의 결혼식이 있자 그 축하 잔치에 모든 신이 초대되었다. 하지만 딱 1명 불화의 여신 에리스 만은 초청받지 못했다. 화가 난 에리스는 잔치에 참석해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고 새겨져 있는 황금사과를 던지고 가버렸다(에리스는 불화·분쟁·싸움·전쟁의 여신으로 밤의 여신 닉스의 딸이라고도 하고, 제우스와 헤라의 딸로 군신 아레스의 누이동생이라고도 한다. 늘 아레스를 따라다니면서 분쟁과 불화를 일으켰으며, 올림포스의 신들조차 함부로 못했다. 망각의 화신 레테와 재앙의 여신 아테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황금사과를 서로 가지려고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가 다투었다. 주신 제우스는 이들의 다툼을 중재하기 위해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의 아들로 당시 카즈 산에서 양치기를 하던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겼다.

여신들은 파리스에게 저마다 가장 중요한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하며 자신을 선택하기를 바랐다.

헤라가 제안했다.

“세계의 주권을 주겠다.”(더러는 ‘아시아의 군주가 되게 하겠다’고 제안했다고도 한다)

아테나가 제안했다.

“지혜를 주겠다.”(더러는 ‘전쟁에서의 승리’를 제안했다고도 한다)

아프로디테가 제안했다.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

파리스는 세 여신의 제안을 모두 듣고 고민하다가 아프로디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아프로디테가 황금사과의 주인이 되며 가장 아름다운 여신임을 다시 한번 과시했다. 또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인 헬레네는 스파르타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로 있다가 파리스가 아프로디테의 도움을 받아 납치해 트로이로 데려갔다.

이에 메넬라오스가 그의 형인 아가멤논과 함께 빼앗긴 헬레네를 되찾아오기 위해 도시국가들의 참전을 요청했고 그리스 원정군이 꾸려졌다. 이후 그리스군이 배를 타고 트로이로 출정함으로서 그리스 신화 사상 가장 크고 극적이며 유명한 전쟁이 일어났다.

이 전쟁에는 그리스와 트로이의 영웅들이 모두 출동하다시피해서 화려한 면면을 자랑한다. 그리스 진영에는 아킬레우스, 오디세우스, 아이아스 등이, 트로이 진영에서는 파리스, 헥토르, 아이네이아스 등이 앞장 서서 활약했다. 또한 신들도 개입하게 되어 트로이 전쟁이 일어난 이후 파리스에게 앙심을 품은 헤라와 아테나가 그리스 편을 들었고, 아프로디테는 트로이를 도왔다. 뿐만 아니라 10년이나 이어진 긴 전쟁을 거치면서 숱한 영웅들과 신들이 서로의 입장에 따라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 혼전을 거듭했다.

트로이 전쟁의 개요

그리스군은 메넬라오스의 형이자 미케네 왕 아가멤논을 총대장으로 하는 그리스군의 트로이 원정이 진행되었다(더러는 아가멤논이 아르고스, 코린토스의 왕으로도 나온다). 이후 원정군이 편성되자 트로이에 도착한 이후 10년에 걸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다가 그리스 진영을 이끌던 오디세우스가 책략을 냈다. 그리스 병사들이 오랜 전쟁에 지친 나머지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거나 심지어 향수병에 걸리자, 이 전쟁을 마무리하기 위한 최후의 승부처였다. 건축가 에페이오스를 불러 그리스군사들을 숨길 속이 빈 거대한 목마를 만드는 한편 트로이 성 안에 첩자인 시논을 보내 거짓 소문을 퍼뜨렸다.

“목마를 가지면 패하지 않는다.”

목마가 완성되자 그리스군은 오랜 원정에 지쳐 고향으로 돌아간다며 배를 타고 떠나면서 그 기념으로 아테나 여신에게 바치려던 목마를 트로이 성 앞에 세워두고 철수하는 체 했다. 하지만 그 목마 속에는 아테나 여신의 도움을 받아 다져진 40명의 무장한 정예 그리스군들이 숨어 있었다.

트로이의 목마를 성 밖에 놓고 그리스로 돌아간다면서 철수해 버리자, 트로이인들은 카산드라와 라오콘의 반대가 있었지만 물리치고 그 목마를 이 성안으로 끌고가 놓아둔 채 승리를 자축하며 술에 취해 잠들었다. 새벽이 되자 목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와 그리스군은 그 틈을 타 내려와 꿈쩍도 않던 성문을 조용히 열자 물러난 척 돌아가다 다시 되돌아온 그리스군이 성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이후 그리스군은 트로이 성안을 유린하며 살인, 방화, 약탈을 일삼으며 그리스의 승리로 끝이 났고 트로이는 멸망했다.

그렇지만 이 전쟁은 그리스군과 영웅들로서도 딱히 얻은 바가 없다. 많은 영웅들이 전쟁 중에 죽었고, 트로이 성은 불에 탔으며, 함락 후 벌인 끔찍하고 야수같은 복수로 인해 전쟁의 벌인 원인조차 명분을 잃게 만들었다. 이후 살아남은 영웅을 비롯해 그리스군조차 모두 뿔뿔이 흩어지며 허망하게 끝났다.

그리스 신화의 워낙 극적인 이야기라 후일담이 정말 많다. 어찌 보면 전쟁보다 더 극적이고 흥미진진하며 풍부하다. 트로이의 함락 후 잔혹했던 그리스군의 복수, 뒤이은 오디세우스의 귀향, 아이아스의 불행, 헥토르의 아내와 아들의 비극, 살아서 탈출한 아이네이아스의 무용담, 아가멤논과 카산드라의 비극 등 수많은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주로 귀향과 귀향 후의 이야기들이 주를 이룬다.

그 밖에도 아킬레우스의 아들인 네오프톨레모스, 헤라클레스의 활과 화살로 파리스를 죽인 신궁 필록테테스, 아가멤논의 아우인 메넬라오스, 달콤한 연설가인 네스토르 등 많은 그리스 진영의 영웅과 용사들이 조국과 고향으로 돌아갔다. 특히 오디세우스는 귀향 길에서 다채로운 모험을 겪어 그 내용이 가장 알차고 많으며 무용담을 펼치면서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트로이 전쟁에 관한 이야기는 영웅들의 이야기, 서사시, 그림과 조각 등 예술작품, 연극과 영화 그리고 드라마로 만들어지며 오늘날까지도 꾸준히 사랑받으며 전해지고 있다.

<트로이 유적>

트로이 전쟁은 그 역사적 사실에 대해 논란이 많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잘 꾸며진 신화로 판단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그러나 독일의 상인·고고학자로 탐험가인 하인리히 슐리만이 사실이라고 믿고 발굴에 나섰고, 1873년에 트로이 유적지를 발굴하여 이 전쟁에 대한 결정적인 역사적 근거를 찾아낸 뒤 지금은 누구나 사실로 믿게 되었다.

신화와 전설조차 그 상상력의 근원이나 역사적 파편을 쫓아가다 보면 사람들이 실제로 살면서 벌어진 일을 말하고 표현한 것에 근거한 것이며, 오랜 세월 속에 꾸며지고 각색되어진 것이 절대다수다.

사람은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아서 트로이 전쟁 같은 정교한 이야기를 만들어내기가 거의 어렵다. 트로이 전쟁은 하인리히 슐리만이 어릴 적부터 즐겨 읽던 <일리아드>를 통해 트로이의 실존을 믿고 1870년에 발굴을 시작한 이후 1873년에는 마침내 트로이의 유적을 발견했다.

나중에 밝혀졌지만 9개 층으로 나뉘어져 시대별로 막대한 건축물과 유물들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슐리만은 엉뚱한 유적을 트로이 유적으로 착각했고, 트로이 유적에만 집착한 착오와 무모한 발굴로 많은 파괴와 유실이 있었다. 트로이의 발굴품은 독일 베를린의 국립미술관에 수장되었다가 대부분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혼란기에 없어져 버렸고, 그 뒤의 일부 출토품은 그리스 아테네 국립 고고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리고 트로이 유적에 대한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그리스로마 신화(9): 트로이 전쟁(1) (2025)
Top Articles
Latest Posts
Recommended Articles
Article information

Author: Edwin Metz

Last Updated:

Views: 5646

Rating: 4.8 / 5 (58 voted)

Reviews: 89% of readers found this page helpful

Author information

Name: Edwin Metz

Birthday: 1997-04-16

Address: 51593 Leanne Light, Kuphalmouth, DE 50012-5183

Phone: +639107620957

Job: Corporate Banking Technician

Hobby: Reading, scrapbook, role-playing games, Fishing, Fishing, Scuba diving, Beekeeping

Introduction: My name is Edwin Metz, I am a fair, energetic, helpful, brave, outstanding, nice, helpful person who loves writing and wants to share my knowledge and understanding with you.